학기말의 그 밤을 아실 겁니다.

교과별로 스무 명, 서른 명분의 문장을 채워야 하는데 열 명쯤 쓰고 나면 문장이 다 비슷해집니다. 열심히 참여함, 성실히 수행함, 이해도가 높음. 분명 아이들은 다 다른데 문장은 자꾸 같아집니다.

그래서 이 일에 AI를 써도 되는지 묻는 분이 많습니다. 답을 먼저 드리면 이렇습니다. 써도 됩니다. 다만 앞의 두 편과는 선 긋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왜 통신문과 다른가

가정통신문은 틀리면 다시 보내면 됩니다. 상담 문자는 오해가 생기면 만나서 풀 수 있습니다.

기록은 다릅니다. 남습니다. 그리고 학생 개인에 대한 공적 기록입니다. 몇 년 뒤 다른 사람이 그 문장을 읽고 그 아이를 판단합니다. 무게가 다른 일이니 기준도 달라야 합니다.

제도가 이미 선을 그어두었습니다

학교생활기록 작성 및 관리지침을 보면, 초등학교 교과학습발달상황의 성취수준 및 특기사항에는 교과별 성취기준에 따른 학생의 성취수준 특성을 문장으로 입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는 학생은 특기사항을 덧붙이고요.

여기서 중요한 건 순서입니다. 문장이 먼저가 아니라 성취기준과 관찰이 먼저입니다. 문장은 그것을 옮긴 결과일 뿐입니다.

또 하나 볼 근거가 있습니다. 교육부와 17개 시도교육청이 함께 마련한 수행평가 AI 활용 관리 방안입니다. 학생의 AI 사용에 관한 지침이지만, 거기 담긴 원칙이 교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 AI는 보조적으로 활용하되 평가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훼손하지 않을 것
  • 교사가 직접 학생의 활동을 관찰하여, 학생의 독자적 사고에 따른 결과물이 평가에 반영되도록 할 것
  • AI 생성물을 사용 기록 없이 그대로 내놓고, 그 내용을 묻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인정되지 않을 수 있음

마지막 항목을 학생이 아니라 나에게 적용해보면 기준이 아주 선명해집니다.

내가 쓴 종합의견에 대해 "이 문장은 어떤 장면을 보고 쓰신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할 수 있는가.

답할 수 있으면 써도 되는 문장입니다. 답할 수 없으면 AI가 지어낸 문장입니다. 학생에게 요구하는 기준을 교사가 먼저 지키는 셈이죠.

그래서 선은 여기입니다

AI에 맡기면 안 되는 것

  • 관찰 없이 문장부터 만들어내는 것
  • 학생 이름·학번 등 개인정보를 입력창에 넣는 것
  • 없는 장면을 그럴듯하게 채우는 것
  • 최종 판단과 책임

맡겨도 되는 것

  • 내가 적어둔 관찰 메모를 문장으로 다듬기
  • 성취기준 용어에 맞게 표현 정리하기
  • 서른 명분 문장의 중복 걸러내기
  • 글자 수 맞추기, 문체 통일하기
  • 나이스 시스템에 입력시키기

한 줄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AI는 내가 본 것을 문장으로 만들 뿐, 보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관찰 메모가 전부입니다

여기서 지난 글의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결국은 데이터입니다.

종합의견을 잘 쓰는 사람은 문장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기록을 남겨둔 사람입니다. AI를 쓰든 안 쓰든 이건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AI를 쓰기 시작하면 이 차이가 더 벌어집니다. 메모가 있으면 금세 끝나고, 메모가 없으면 AI가 그럴듯한 거짓말을 만들어주는 걸 지켜보게 되니까요.

메모는 복잡할 필요 없습니다. 세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 언제: 5월 3주
  • 무슨 장면: 분수 나눗셈에서 자기 방법을 그림으로 설명함. 짝이 이해하지 못하자 다른 방법으로 다시 설명
  • 어느 성취기준과 닿는가: 수학 성취기준 번호

한 아이당 한 학기에 서너 개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수업 끝나고 두 줄 적는 걸로 됩니다.

실전 프롬프트

입력창에는 이름 대신 번호나 기호를 씁니다.

javascript
너는 초등학교 담임교사다.
아래는 내가 한 학기 동안 적어둔 관찰 메모다.
이걸 바탕으로 교과학습발달상황 문장을 써 줘.

[관찰 메모 - A학생]
- 5월: 분수 나눗셈에서 자기 방법을 그림으로 설명. 짝이 이해하지
  못하자 다른 방법으로 다시 설명함
- 6월: 어림하기 활동에서 답을 먼저 예상하고 계산으로 확인하는 습관
- 9월: 도형 단원은 어려워했으나 모형을 만져보며 접근하려 함

[성취기준]
(해당 성취기준 붙여넣기)

[조건]
- 3~4문장, 공백 포함 400자 안쪽
- 성취기준 용어를 살려서 쓸 것
- 메모에 없는 내용은 절대 추가하지 말 것
- 잘하는 점만 나열하지 말고, 성장의 방향이 드러나게
- '열심히', '성실히' 같은 막연한 표현은 쓰지 말 것
- 문장마다 어떤 메모에서 나온 것인지 괄호로 표시해 줄 것

마지막 줄이 이 프롬프트의 핵심입니다. 근거를 함께 내놓게 하는 것. 괄호를 보면서 검토하면 지어낸 문장이 바로 걸립니다. 검토가 끝나면 괄호만 지우면 되고요.

서른 명이 다 비슷해지는 문제

이건 AI 없이도 생기는 문제인데, AI를 쓰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같은 프롬프트에 비슷한 메모를 넣으면 비슷한 문장이 나오니까요.

다 쓴 뒤에 이렇게 점검해보세요.

javascript
아래는 우리 반 학생들의 교과학습발달상황 문장이다.

1. 여러 학생에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을 찾아줘
2. 서로 구별되지 않는 문장 쌍이 있으면 짚어줘
3. 특정 학생만의 장면이 드러나지 않는 문장을 알려줘

내용을 고쳐서 다시 쓰지는 말고, 어디가 문제인지만 알려줘.

고쳐 쓰라고 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문제 지점만 받고 수정은 내가 합니다. 그래야 결과물의 주인이 나로 남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스킬이 필요합니다

학기마다 반복되는 일이고 조건도 매번 같습니다. 지난 편에서 다룬 스킬로 만들어두기에 딱 맞습니다.

스킬에 이런 것들을 박아두면 됩니다. 이름 대신 기호를 쓸 것, 메모에 없는 내용은 만들지 말 것, 근거를 괄호로 표시할 것, 글자 수 제한, 우리 학교에서 쓰는 표현 목록, 그리고 마지막에 중복 점검까지.

한 번 만들어두면 다음 학기에는 메모만 넣으면 됩니다.

그래도 남는 위험

가장 조심할 것은 그럴듯한 미담입니다.

AI는 좋은 문장을 만들려고 합니다. 메모에 "짝에게 다시 설명함"이라고만 적혀 있어도 "배려심이 깊어 친구들의 학습을 돕는 데 앞장서며"까지 부풀려 놓을 수 있습니다. 읽으면 참 좋은 문장인데, 그건 내가 본 게 아닙니다.

이런 문장이 남으면 나중에 곤란해집니다. 학부모가 "우리 아이가 그렇게 앞장서는 편인가요" 하고 물었을 때 근거를 댈 수 없으니까요.

검토할 때 이것만 보세요. 이 문장 하나하나에 대해, 내가 실제로 본 장면을 댈 수 있는가.

마지막은 사람이 봅니다

학기말에 우리가 하는 일은 문장을 채우는 게 아니라, 한 아이의 한 학기를 요약하는 일입니다. 요약할 자격은 그 아이를 본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AI는 문장을 다듬어줍니다. 시간도 확실히 줄여줍니다. 그런데 무엇을 쓸지는 여전히 교사가 정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의 재료는 봄부터 적어둔 두 줄짜리 메모들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조금 가벼운 쪽으로 갑니다. 수업 지도안과 활동 설계인데, 여기서도 출발은 같습니다. 성취기준부터 붙이는 것입니다.


참고 자료

  • 교육부, 「학교생활기록 작성 및 관리지침」(교육부훈령 제555호, 2026.3.1. 시행)
  • 교육부·17개 시도교육청, 「수행평가 시, 인공지능(AI) 활용 관리 방안」(2025.12.)
  • 17개 시도교육청, 「2026학년도 학교생활기록부 기재요령(초등학교)」